정릉 교수단지 50년의 이야기

정릉 아리랑 시장을 지나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정릉 표지판을 따라 언덕을 오르다 보면 아파트 숲 사이에 둥지를 틀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 있다. 

조선의 첫 번째 왕비였던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과 그녀의 원찰인 흥천사를 잇는 마을, 바로 교수단지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정릉을 기준으로 우측, 즉 백호 자리에 해당하는 교수단지는 어떤 마을이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1960년대, 서울대학교 주택조합이 만들어지다

1960년대 정릉동을 비롯해 돈암동, 길음동 등지에서 인구가 급증할 때에도 정릉고개와 정릉 입구 사이의 산비탈은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임야지대로 남아 있었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정릉 능역에 포함되어 있어서 해방 후에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동안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다. 

 

1965년 정릉 주변의 임야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주택이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대 교직원들은 조합을 결성해 정릉동 599번지 일대의 토지를 불하받고 이를 ‘교수단지(대학교 교직원 주택단지)’로 개발했다. 서울대 교직원들이 주택단지를 조성하면서 ‘교수단지’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민간에서 조합이 결성되어 주택단지를 개발한 첫 사례였다. 불하 당시 땅값은 평당 4백원에서 800원이었다. 정릉동 599번지 일대의 땅을 매입한 조합원들은 곧 터를 닦았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공대 토목학과와 건축학과 교수진이 참여함으로써 산비탈에 층층이 들어선 축대는 어느 곳보다도 튼튼히 시공되었다. 

                                                        <2016년 현재 지도로 본 정릉 교수단지>

 

 

짓자던 집은 짓지 않고… 주택단지 매각사건

토지를 불하받은 직후 교수단지는 주택조성에 난항을 겪게 된다. 

1967년 ‘주택단지 매각사건’으로 교수들간의 맞고소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주택조성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서울대주택조합이 주택단지를 매매 후 집을 짓는 대신 주택조합총회 대의원회 이사회의 결의에 의해 매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로 인해 조합원 71명이 토지를 ‘임의로 전매했다’고 서울지검에 고소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서울大敎職員用宅地 말썽

 

12일 오전 서울지검 백광현 검사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인 권○대(59, 이박)씨가 집없는 서울대 교직원 77명에게 불하된 국유지 2만여평을 임의로 전매했다는 피해자들의 고소에 따라 권교수와 땅을 샀다는 박○하(서울 성북구 수유동 412의 67)씨 등 6명을 업무상 배임혐의로 입건, 서울시경을 지휘하여 수사에 착수했다. 

 

문리대 장○림교수를 비롯, 남○용, 국○효, 박○병, 윤○섭, 김○정, 이○호,(의대)씨등 교수 7명과 기타직원 64명 등 71명이 연명으로 검찰에 낸 고소장에 의하면 권교수는 지난 63년도에 주택이 없는 서울대 교직원들이 주택단지를 만들어 자립주택을 세우고자 사단법인 「서울대학교주택조합」을 결성했을 때 이사장으로 취임, 65년 11월 1일 성북구 쌍문동 산261의 1, 262․256의 1에 있는 도합 2만 3백여평의 국유림을 불하받게 되어 권교수는 불하대금으로 조합원들로부터 평당 4백원 내지 8백원씩 모두 1천 6백 80여만원을 거두어 자기 이름으로 등기이전을 마치고는 당초 약정을 어기고 전기 박○하씨 등에게 평당 시가의 5분의 1도 안되는 1천 8백원의 헐값으로 매각처분 했다는 것이다. 

고소인들은 소장에서 권교수는 편의상 불하된 국유림이 자기 명으로 돼 있음을 기화로 교육자란 신분을 잊고 조합원인 동료교직원 몰래 임야를 팔아 그 대금을 착복, 부당한 중간이득을 취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경찰의 수사가 끝나 사건이 송치 되는대로 검찰자체에서 다시 권교수 등 피고소인들을 소환심문할 방침이다.

 

▲권○대 교수의 말= 지난 5월 26일 조합 이사회에서 땅 매매문제를 이사장인 나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그후 나○영 부이사장이 동석한 가운데 매매계약을 했었고 대금 3천 8백여만 원은 상은혜화동 지점에 내 명의로 예치, 조합원들이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시가보다 싸게 팔았다고 하나 매매한지 한 달 후에 이웃에 있는 땅이 평당 1천 7백 원에 팔린 사실이 있다.

 

<1967. 11. 13. 동아일보 3면>

 

치사한 교수들 맞고소 서울대 체면에 흙탕물

 

『집없는 교수는 집을 짓자』는 미명 아래 발족한 서울대주택조합은 그동안 부동산붐에 편승, 국유지를 불하받고도 짓자던 집은 짓지 않고 일반에 매각, 조합원은 『싸게 팔았다』, 『비싸게 팔았다』는 두파로 나뉘어 끝내는 고소까지하는 등 야단들.서울대주택조합이 주택단지를 산것까지는 좋았으나 동조합은 2년이 되도록 짓자던 집은 짓지 않고 주택조합 이사장 권○대교수는 결국 주택조합총회 대의원회 이사회의 결의에 의해 매각하기에 이르렀지만 장○림교수 등 71명은 연명으로 『임의로 전매했다』고 서울지검에 고소했다.그러자 권교수 측에서도 무고혐의로 맞고소를 하겠다고 나섰고 세간에서는 고소를 당하는 측이나 고소하는 측이나 모두가 대학교수답지 않은 짓들이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더욱 이 주택지 매각사건은 지난 수년간 대학요직을 둘러싸고 맴돌았던 교수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에도 교묘하게 이용되고 있어 서울대학을 아끼는 인사들은 입맛을 써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권○대교수 측에서는 조합결성 당시는 물론 토지매각당시도 조합원이 아닌 장○림교수가 분규를 조성하고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교수 간에 그것도 학문이 아닌 땅 문제를 갖고 번진 이 고소사건은 서울대학교가 생긴 후 가장 치사한(?) 사건이라는게 사건에 휩쓸리지 않은 교수간의 말이다.

 

<1967. 11. 18. 동아일보 7면>

 

 

 

‘1.21 사건’

주택조합에서 소송과 맞고소로 인해 어수선한 가운데 196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남파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노린 이른바 ‘1.21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수도 서울이 북한 무장간첩에게 뚫렸다는 소식은 많은 서울 시민과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故 박정희(1917~1979) 前대통령은 이 사건 후 서울의 도시계획을 주택건설에서 수도 방비로 대폭 수정하게 된다.

주변의 어수선한 상황으로 교수단지에는 대지만 매입해 놓고 건물을 짓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예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경우가 많아 실제 마을에 입주한 주민 중 서울대 교직원은 많지 많았다. 교수단지 설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마을에 거주하는 박여병씨는 교수단지 조성 당시 주택건축 허가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사항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조금만 늦었으면 허가 받기 어려웠어.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불하 한거니까 허가 해주지. 근데 사실 아랫사람들은 안 된대. 청와대 보호 차원에서 안 된대. 근데 관리청 차장인가 하는 사람이 계장하고 과장하고 불러가지고, 개인이 산 것도 아니고 학교 주택조합에서 불화를 받았는데 허가를 안 해주면 어떻하냐? 빨리 빨리 해줘라! 그래서 허가를 받았어. 근데 그때도 또 ROTC 단장이 손관도라고 있었는데 손관도 대령이 빨리 해야 되겠대. 수도경비사령관이 연모씨가 오면 허가 받기 어려울 거다 그래서 빨리 서둘러서 받았지.

”박〇병(남, 92), 성북구 정릉동 559-70. 2014년 6월 26일 인터뷰 내용.

 

 

우여곡절 끝에 조성된 교수단지, 또다시 광풍이 불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교수단지 조성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정릉2동 506-50번지 일대에 재건축바람이 불면서 마을에는 광풍이 불었다. 2008년 10월 재개발 바람을 타고 ‘정릉 제6구역 주택 재건축 정비사업조합’의 설립인가가 났다. 재건축 소식을 접한 마을은 찬성과 반대파로 나누어 졌다. 재건축을 찬성하는 ‘정릉2동 재건축조합’이 설립되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정릉을 사랑하는 모임(정사모)’을 조직해 재건축을 저지하는 운동을 펼쳤다.

정사모에서는 재건축 반대 의사를 밝히는 플랜카드와 현수막을 걸던 것을, 마을의 특성을 살려 대문에 꽃화분을 꽂아 둠으로써 재건축 반대 의사를 밝혔다. 재건축 반대의사를 밝히는 과정에서도 마을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 했다. 주민들이 직접 인터뷰를 하고 촬영한 영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보내기도 했다. 그 결과 2010년 9월 문화재청 사적분과와 세계문화유산분과 합동위원회에서는 “정릉 주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경우에는 현대적이고 획일화된 높은 콘크리트 구조물로 인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정릉의 역사 문화적 특성과 경관을 크게 훼손할 우려가 높음”으로 인해 정릉 제6구역 주택 재건축 정비사업조합의 문화재 현상변경 심의 신청을 부결했다.